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0] '군자(君子)' 역시 '인(仁)'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휴머니즘'의 색채가 별로 없던 용어였다.
시(詩) 등에서 쓰인 군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에 가까웠는데, 공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 됨의 필수조건이 바로 '인문 정신'과 '도덕성'을 갖춤, 즉 '인'함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이 같은 '인' 사상을 가진 채로 '군자'라는 용어를 쓰고, 공자가 유명해지며, 공자의 말이 확산되고, 공자의 말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전파되면서, 공자의 '군자'가 종래의 '군자'를 압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군자는 '도덕적 지성인'의 의미가 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의 현상이 맹자의 '대장부(大丈夫)'에서도 보이는데, 다만 백가쟁명(百家爭明) 시대의 맹자의 말의 파급력, 장악력은 공자보다 덜했으며, 그 자신부터가 자신의 '대장부' 보다는 공자의 '군자'를 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맹자의 '대장부'는 종래의 '대장부'를 압도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11] 유가(儒家),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당시의 원시 유교에서부터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등 수많은 타 학파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며(물론 꽤나 비우호적인 교류였지만) '생존'했다. 당연히 타 학파의 사상에서 온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그것을 자기 학파의 논리로 내재화해 오면서 명맥을 유지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맹자(孟子)는 공자의 최고 가치 '인(仁)'에 대항하기 위하여 묵자(墨子)가 내세운 최고 가치 '의(義)'를 오히려 공자식으로 강조해 '인의(仁義)'의 병칭어(竝稱語)를 유가적 개념어로 보편화시켰고, 순자(荀子)는 이에 더해 도가적 수양론(修養論)과 법가적 정체론(政體論), 명가적 명실론(名實論)을 비판적 수용하고 그것을 유가적 예치주의로 귀결시켰다. 중세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性理學,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양명학(梁明學)도 그 당시의 경쟁 사상계(思想界)인 도교(道敎), 불교(佛敎)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성립한 것이었다. 산 속에 박혀서 자기네들끼리 1대 2대 3대 하면서, 순수하게 후계자 머리에서 불현듯 새롭게 튀어나온 사상만 새로 추가되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
[12] 또한 이는 공자 사상이 역시 주축이 되되, 공자 이외의 옛 성현(聖賢)의 사상도 유가 사상이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요(堯), 순(舜), 우(禹), 탕(湯), 이윤(伊尹),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태공망(太公望), 백이(伯夷) 등은 물론이요, 관중(管仲), 자산(子産), 유하혜(柳下惠), 안영(晏嬰), 섭공자고(葉公子高) 등도(물론 후자의 양반들은 공자보다 격이 떨어진다 여겨졌고, (비판할 땐 또 제대로 비판하긴 했지만) 후대 유가 사상가들이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란 공자만 일종의 유일신마냥 받드는 종교가 아니었다. 맹자만 해도, 평소에 관중에 대해 심심하면 비판하더니, '하늘이 큰 일을 맡긴 사람'의 예를 꼽을 때 관중을 거론하고, 안영도 관중과 세트로 한 번 비판해놓고 제(齊)나라 선왕(宣王)을 계도할 때는 안영의 말을 인용하는 등 닫히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유하혜도 '조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유하혜는 성인(聖人) 가운데 온화한 사람이었다.' 하며 이윤, 백이와 같은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또 백이도 '결벽 떠는 게 심했다'며 비판해놓고서, '백이는 성인 가운데 청렴한 사람이었다.'면서 칭찬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