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조선 영의정 류성룡柳成龍(1)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 | Ryu Seongryong
출생
1542년 11월 7일 (음력 중종 37년 10월 1일)
조선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2]
사망,1607년 5월 31일 오전 7시~9시 사이(향년 64년 6개월 24일 / 23,581일)
(음력 선조 40년 5월 6일 진시, 향년 66세)
조선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 서미동 초당 정침(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2리
1. 개요, 조선의 문신, 외교관, 학자.
2. 생애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안동 김씨(安東 金氏)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소강(金小姜)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어린 시절 한양으로 올라와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때 충무공 이순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이 있다.
1564년 명종 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았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건저 문제(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하는데 류성룡은 남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이 무렵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능란하며 경우가 바르고 말솜씨 있는 사람은 류 정승만 한 이가 없다."
- 이항복,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18]
이때쯤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결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던 참이었지만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강력한 왜군 침입 예고와 대비 주장에도 류성룡은 같은 당파 동인이자 쌍벽을 이루는 이황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의 보고를 듣고 기본적으로는 설마했던 것 같다.[19] 하지만 역시 찜찜했는지 이순신이나 권율 등을 천거해서 등용하도록 조치하고 각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