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기획보도] 해썹 인증, '벽 세워야 통과?'…형식주의가 만든 현장 혼란
청결구역·일반구역 칸막이 강제 논란…현장과 동떨어진 심사 관행에 개선 요구 확산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 이하 해썹) 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청결구역과 일반구역을 물리적으로 구분하라’는 심사 요구가 현장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벽이나 칸막이를 설치하지 않으면 감점하거나 인증이 어려워지는 심사 관행이 업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불필요한 공사 비용과 작업 비효율을 유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청결구역은 식품 제조공정 중 오염 위험이 높은 구간과 그렇지 않은 구간을 나누어, 교차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하는 HACCP의 기본 개념이다. 하지만 이를 벽체 설치 등 물리적 구분 방식으로만 해석하고, 이를 사실상 ‘강제 조항’처럼 적용하는 사례가 다수다.
실제로 한 반찬 제조업체 관계자는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벽을 세우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공정 흐름상 오히려 동선이 꼬이고 위생관리에 더 불리하다”며 “수백만 원의 공사 비용까지 감당하라고 하면 결국 HACCP 인증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물리적 분할 강요가 오히려 식품안전의 본래 취지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위적인 칸막이 설치로 인해 작업자가 오염구역과 청결구역을 오가야 하고, 환기나 세척 효율이 떨어지는 등의 이차 위생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냉장 공간의 경우 벽체로 인해 공조 시스템이 차단돼 온도 유지에 실패하거나 결로가 발생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요구가 법령상 강제 사항이 아님에도 일부 심사원이나 평가기관의 ‘내부 기준’이나 관행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식품위생법 시행규칙과 HACCP 운용지침에는 구역 설정의 ‘기능적 구분’을 요구할 뿐, 벽체 설치를 의무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 심사에서는 물리적 구분이 없다는 이유로 감점되거나 심사 탈락의 사유가 되는 일이 빈번하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기능 중심의 유연한 해석과 심사 기준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작업자 동선의 일방향화, 장비 색상 구분, 작업복 교체 등 비물리적 오염 차단 방식도 충분히 기능적 구분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작업장의 규모와 업종 특성에 맞춘 탄력적 기준 적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소규모 전통식품 업체나 반찬류 제조업체처럼 공간 제약이 있는 경우, 형식적 칸막이보다 오히려 체계적인 위생관리와 작업 흐름 관리가 더 실질적인 위생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현장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전문가 A씨는 “청결구역은 공간이 아니라, 관리 방법과 의식의 문제”라며 “물리적 칸막이보다 위험요소를 실제로 통제하고 있는지, 작업 흐름과 위생 기준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심사기관에도 변화가 요구된다. HACCP 심사관 교육과 평가 기준 매뉴얼에서 구역 구분의 ‘목적’을 중심으로 한 기준 정비가 필요하며, 심사원의 재량에 따른 일률적 요구가 줄어들도록 제도적 가이드라인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형식보다 실질, 외형보다 기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해썹 인증 제도가 개선될 때, 현장은 보다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식품안전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